그라운드시소 한남 | 2026.04.30 – 2026.09.27
그라운드시소 한남에서 성률 작가의 기획전을 보고 왔다
여러 번 벼르다가 다녀온 전시인데 입구에서부터 압도되는 느낌이 있어서 그 인상부터 풀어보려 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거대한 스크린 하나가 정면을 가득 채운다
소년과 소녀가 구름 위를 걷듯 지붕을 밟고 있는 장면
그 위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적란운이 화면 전체를 채운다
"여름을 닮은 우리"라는 타이틀이 구름 사이로 떠 있는 구도였다
사진으로만 보던 성률의 그림이 이렇게 큰 스케일로 펼쳐지니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원래 수채화는 손바닥만한 종이 위에서 완성되는 매체인데 이걸 벽면 크기로 키워도 디테일이 살아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입장하면서 받은 티켓도 같은 이미지였다
하단에 작은 글씨로 "Seongryul / Summer in Us"라고 영문 제목이 병기되어 있었다
티켓 자체도 빳빳한 무광 종이 질감이라 소장하고 싶어지는 디자인이었다

전시장 입구 — 작가 소개 공간
본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회색 콘크리트 톤으로 마감된 곡선형 복도였다
벽 위로는 조명 받은 조형 식물이 늘어져 있고 바닥에는 그 그림자가 자연스럽게 깔린다
여기서 작가 소개 텍스트를 만났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성률은 맑고 투명한 색채와 섬세한 묘사로 풍경 속의 작지만 따스한 이야기를 전하는 작가다
유독 사라졌거나 언젠가 사라질 공간에 마음이 끌린다고 말하며 오래된 아파트 단지, 친구들과 뛰놀던 골목, 그 풍경 속에 자리한 소년과 소녀를 그린다
이 서정적인 시선이 보는 이의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리며 희미해진 기억을 선명하게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흥미로웠던 건 숫자였다
SNS상에서 전 세계 60만 팔로워를 모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졸업작품이었던 그래픽노블 『여름 안에서』로 2022년 일본국제만화상에서 한국인 최초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내용
이후 배제민, 이하이 등 뮤지션의 앨범 아트워크와 유니클로, 에르메스 같은 글로벌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대중과의 접점을 넓혔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이 좋았다
성률에게 그림은 서로를 기억하고 보살피는 기록이라는 문장
이번 전시는 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을 지나 회화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는 작가가 다른 성장의 시작점에서 건네는 인사라고 마무리되어 있었다
작가 소개 옆 벽면에는 "여름을 닮은 우리"라는 전시 제목이 손글씨 느낌의 서체로 새겨져 있고
그 사이로 두 개의 좁은 통로가 나 있어서 마치 골목 사이를 지나가는 듯한 연출이었다

복도를 지나면 흰 벽에 다음 텍스트가 적혀 있었다
"내리쬐는 햇볕을 피할 길 없었던 어느 여름날의 우리를 기억하나요
그때 우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뛰고 땀 흘리고 울고 웃었을까요
작가의 진솔한 이야기를 따라 작은 것 하나에도 온 마음을 다했던 시절을 만나보세요"
이 문장을 읽고 나니 왜 작가가 '기록'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강조했는지 이해가 됐다
이 전시는 거창한 메시지보다는 한 사람의 사적인 여름을 들여다보는 구조였다
QR코드로 영문 설명도 함께 제공되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을 마주했다
공간은 화이트큐브에 가까웠고 군더더기 없이 작품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만드는 배치였다
가장 먼저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무성한 식물들 사이에서 두 아이가 화분에 물을 주는 장면이었다
남자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물뿌리개를 들고 있고 여자아이는 팔을 뻗어 분무기를 쏘고 있다
화분걸이에 매달린 알록달록한 화분들과 그 뒤로 무성한 나뭇잎이 화면을 가득 채워서 마치 정글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다음은 「힙스터」라는 제목의 작품
빨간색과 파란색 셀로판이 끼워진 3D 안경을 쓴 소년이 놀이터 그네 앞에 무표정하게 서 있는 그림이다
바닥에 떨어진 빛과 그림자의 패턴이 거의 추상화처럼 복잡하게 표현되어 있었는데 이게 성률 작업의 특징 같았다
빛이 떨어지는 모습 하나하나를 허투루 그리지 않는다는 인상

그다음은 계단에 앉은 두 아이를 그린 큰 사이즈의 작품이었다
앞쪽에는 땀에 젖은 표정의 소녀와 소년이 화분들 사이에 앉아 있고
뒤쪽 문가에는 해골이 그려진 미스핏츠 티셔츠를 입은 또 다른 아이가 서 있다
세 인물의 시선이 제각각이라 한 장면 안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벽돌, 계단, 화분 하나하나의 질감 표현이 정교해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골목길 화단 옆에 나란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두 아이를 그린 작품도 좋았다
장미 넝쿨이 우거진 나무 울타리와 주차된 차들이 배경으로 깔리고
두 아이는 등을 맞댄 듯한 구도로 같은 방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뭘 보고 있는지는 그림에 나오지 않는데 그 여백이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했다

큰 고무대야에 물을 받아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의 그림도 인상 깊었다
대야 속에 비친 나뭇가지와 하늘의 반영, 그리고 그 옆에 쪼그려 앉은 인물의 손가락이 화면 위쪽 벽돌을 가리키고 있다
시점 자체가 독특해서 관찰자의 위치를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계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동차 두 대 사이로 보이는 골목, 그 사이를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과
같은 골목을 살짝 다른 각도에서 그린 또 다른 그림도 나란히 걸려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쪼개지는 햇살의 표현이 거의 점묘에 가까울 정도로 세밀했다
이 두 점은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이나 다른 시선으로 포착한 연작처럼 보였다

대만으로 추정되는 거리 풍경 속 두 아이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신난 표정을 짓는 장면도 있었다
오토바이들이 늘어선 골목, 한자 간판, 분홍색 타일 벽
이국적인 색감과 질감이 다른 작품들과는 결이 살짝 달라서 작가가 여행 중 포착한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터널 안에서 바깥의 초록빛을 내다보는 구도의 그림도 있었다
이 그림을 배경으로 포토존도 있었는데, 일본 + 여름 감성의 끝판왕이 아닐까 싶었다.
이외에도 많은 그림들이 있었고, 전시회 티켓에도 있었듯이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그림은 보면서도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전체 인상
전시를 다 보고 나니 성률이라는 작가가 왜 그렇게 '사라질 풍경'에 집착하는지 알 것 같았다
화려한 사건은 없다
아이들이 물을 주고 계단에 앉고 골목을 걷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전부다
근데 그 평범함을 그릴 때 들어가는 디테일의 밀도가 어마어마하다
빛이 잎사귀 사이로 떨어지는 방식, 그림자가 콘크리트 바닥에 흩어지는 모양, 낡은 벽돌의 질감까지
이건 단순히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두려는 절박함 같은 게 느껴지는 작업이었다